수업문의 | 레비트라 판매처 사이트 ╋ 24.cia756.com ╋ 미국아이코스맥스 제네릭 구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구형재병 작성일26-07-27 14:02 조회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 57.cia158.net 】
조루방지제 후불제 ╋ 22.cia158.net ╋ 비아그라 복제약
프릴리지 가격 ╋ 22.cia565.com ╋ 씨알리스구입방법
비닉스효능 ╋ 75.cia169.com ╋ 프릴리지가격
처방전 필요없는 비아그라 ╋ 29.cia756.net ╋ 물뽕구입하는곳
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
<영상일기>는 전라도 남원 유생 김재홍(金在洪)이 1892년 10월 초7일부터 1895년 정월 30일까지 자신이 겪은 경험과 전해들은 사실을 날짜별로 작성한 일기이다.
그는 최제우로부터 시작하여 최시형에 이르기까지 동학의 세가 커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이들의 운동을 사도로 규정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실제 향촌에서 벌어진 농민군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3년조에는 2월 10일 동학이 창의라 하여 전라도 여러 읍의 관아 문에 착왜양에 관한 방서를 붙인 사건, 3월에 삼남 동학 무리가 각도에 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충청도 보은과 영남의 밀양, 호남의 금구에서 각기 수만 명씩 모인 사건 등을 기록하였다.
1894년조에서는 3월 29일 고부 농민봉기의 소식을 전해듣고 이후 황토현 전투상황과 전주 공방전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한 농민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순창군수가 실시한 향약과 오가작통, 각 지역 수성군의 활동을 기록하였으며, 6월과 7월 사이에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의 설치를 둘러싸고 벌인 농민군과 각군 수성군과 벌인 전투상황도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특히 남원 등지에서 부민을 침탈하고 대동미나 전을 압수하는 등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을 폐단으로 부각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과 김개남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데, 7월 2일 전봉준이 남원에 들어왔고 동학농민군이 남원지역을 완전 장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8월 19일 이후 남원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기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8월 19일 남원 부동 정감역 등은 농민군 수천명을 지휘하여 남원 관아에 있던 무기 등을 수거해 갔으며 남원성내와 교룡산성에 근거한 농민군이 각각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26일자에는 김개남이 전라도 농민군 대도소를 남원부에 두고 5영을 설치하였는데, 각 군영이 거느린 농민군이 5,6천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릴게임검증
. 이는 황현의 <오하기문>, 박기현의 <일사> 기록과 함께 8월 25일 남원 농민군대회와 김개남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으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10월 14일자에는 김개남이 전주부로 향하면서 민간에서 거두었던 쌀을 팔았으며 심지어 사족들도 많이 농민군을 추종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때 <영상일기>의 저자 김재홍은 남원 동쪽 번암방 주암촌 앞으로 피신하여 우거하였다. 그러면서도 농민군의 동정을 수시로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10월 28일자에서는 김개남이 전주감영을 장악하였다고 하였다. 11월 8일자에는 전봉준이 홍주에서 패해 삼례역으로 도망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 오류이다. <영상일기>에는 전해 들은 여러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른 것들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렇지만 김재홍이 농민군이 크게 활동한 남원지역에 직접 살았기 때문에, 당시의 남원 상황을 생생히 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예를 들어 김개남이 없는 남원의 농민군세력은 여전히 강대하였으며, 11월 14일 운봉을 치기 위해 농민군 수만명이 관음치 아래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에게 패하였으며, 박봉양 민보군이 12월 4일 남원성을 .령하여 농민군이 패주한 사실을 적고 있다.
1895년 1월 18일자에는 일본군 수백명이 남원 번암원에 묵으면서 방수막을 모두 불태우고 부녀자를 찾아내는 등의 잔학한 행위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의 민간 침탈 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기록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영상일기> 마지막 기록이 1895년 1월 30일자인데, 왜놈을 배척하기 위해 영남 선비들이 통문을 돌린 내용을 담고 있어 많은 시사。을 주고 있다.
모바일 오리지널야마토
이렇듯 이 기록물은 1893년과 1894년에 걸쳐 전라도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한 전라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지방유생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와 대응방식도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충남 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갑오기사(甲午記事)>
갑오기사 - 1894년 3월 21일
<갑오기사>는 충남 서천에 살고 있던 최덕기(崔德基, 1874∼1929)란 시골 유생이 쓴 40년간의 일기 중에서 1894년 3월 21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발췌된 내용이다. 그의 처갓집도 홍산에 있어 지역 사정에 매우 밝은 인물이다.
일기인 만큼 상당 부분이 자신의 개인사에 관한 것이고 일부만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최덕기는 서천은 물론 인근 청양·홍산·홍성 등 충남 남부지역을 두루 다니는 것으로 보아 향교나 서원 등에서 공적인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는 평범한 유생과는 달리 주변의 상황이라든지 중앙의 동향까지도 전해들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전해 듣고 경험하고 느낀 내용들을 일기에 담았고, 이런 。에서 이 기록물은 서천지역을 비롯한 부근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상황과 그에 따른 향촌의 분위기를 비교적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로 판단된다.
예컨대 최덕기는 전라도에서 동학이 크게 난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4월 5일 처음 들었으며, 이 때문에 임천 등지에서 포수를 모아 방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충남 서천에 사는 최덕기가 동학농민군이 4월 27일 전주성을 。령한 소식을 5월 1일 들었을 정도로, 동학농민혁명 관련 소식이 인근 지역에 빠르게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6월 11일에는 일본군과 청국군이 서울에 들어와 큰 난리가 났으며 일본이 왕을 황제로 삼아 청나라를 배반하게 한다는 소식도 들었을 정도로, 비록 시골에 살고 있을지라도 나라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릴게임강시
.
<갑오기사>에 동학농민군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6월 27일자이다. 농민군이 가락암에 모여 최덕기의 백부 산소를 파내려 하였는데, 이들은 윤동에 사는 접주 김시형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렇듯 서천지역은 6월 하순부터 농민군이 죄인을 잡아다 다스리고, 무력시위를 벌이고, 도회를 여는 등 본격적으로 활동, 사실상 향촌사회를 장악하였다.
갑오기사 - 1894년 9월 20일
또한 9월 18일에는 전라도에서 온 농민군으로부터 전봉준과 함께 강을 건너 임천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20일에는 전봉준이 병사를 이끌고 여산에 이르렀다는 소식도 접한 것으로 보아, 9월 10일경 삼례에서 재봉기한 전봉준 관련 정보가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여 서천지역 동학농민군들도 대응하였는데, 임천 농민군 수천명은 읍내 뒤쪽 성우산에 성을 쌓는 등 전봉준의 재봉기에 맞추어 움직여나갔으며 일부 전라도 농민군이 금강을 건너 서천지역으로 올라와 북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9월 25일자 기록에는 일본군이 호남 농민군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 10월 4일자에는 남북접의 농민군이 합세하였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정확성은 떨어질지라도 시국 상황을 매우 빠르게 접하였다.
그밖에 <갑오기사>에는 10월에서 11월에 걸쳐 서천지역 농민군의 움직임, 금강을 넘어온 함열 등지 전라도 농민군의 동태, 임천 농민군의 활약상(10월 22일조), 한산읍성의 함락(11월 12일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갑오기사는 갑오년 당시 서천지방을 비롯한 그 일대에서 동학의 전파와 농민군의 활동, 그리고 전투상황 등이 시골 유생의 눈을 통해 거칠지만 현장감 있게 정리된 드문 자료라 할 수 있다.
원본 자료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원산리에 있는 최치원을 배향한 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김양식(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
기록 정보를 제공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