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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호남수래 작성일25-06-30 11:29 조회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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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꺼졌지만, 그날의 흔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길었고 누군가에겐 한순간 같았던 100일. 나무는 다시 잎을 틔웠고 들판엔 풀이 무성하게 자랐지만, 사람들의 시간은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29일 검붉은 화염이 첫 발자국을 찍었던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산자락을 다시 올랐다. 당시엔 적막만이 감돌던 곳,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발화지 초입엔 허리춤까지 자란 풀이 바람에 일렁이며 싱그러운 풀내음을 스탁론비교 풍겼다. 풀숲 사이에선 인기척에 놀란 오소리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발화 지점에는 폴리스라인이 그대로 둘러쳐져 있었다. 무덤은 비바람에 씻겨나간 재 대신 무성하게 자란 잡초로 우거져 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29일 오전 산불 최초 발화지 호주성적 인 의성군 안평면 산소 주변에 폴리스라인이 그대로 남아있고, 산 너머에는 불에 탄 나무들이 보인다.


산불 발화지 의성 안평면 괴산리 묘지, 출입통제 속 잡초만 무성안동·청송·영양·영덕 임야 등 잿빛 흔적… 피해 복구 ‘더딘 걸음’문화재 탄 고운사·대출 막막한 공장·농사는 지었지만 생계 위기타는 냄 보험설계사 실업급여 새만 나도 손 떨림 등 트라우마 심각… 상담 효과도 없어모듈러 주택 노인들 “여기가 이제 우리집… 이웃과 함께라 위로”
인근에 사는 이숙자(99) 할머니는 그날의 상황을 떠올리며 되새기기 싫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씨가 눈앞에 날아다녔어요. 불이 담장을 넘어오는 게 보이니까, 정신이 아찔하더라고. 손에 뭐 론테크 하나 못 챙기고 그냥 뛰었지요. 그날 이후 자꾸 그 장면이 떠올라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할머니는 외지에 사는 딸이 자주 내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위로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딸 덕에 많이 진정됐어요. 딸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떻게 살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다른 마을 사람들은 텔레마케터 자격증 조심스럽게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수확 철을 맞은 마늘밭에서는 농민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한 농민은 땀에 젖은 셔츠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밭은 다행히 불길을 피했는데 마늘이 작아요. 물도 부족했고, 연기 탓인지 생육이 영 안 좋았어요. 창고는 홀라당 탔고 지금은 비닐하우스 옆에 임시 건조대를 세워 말리고 있어요. 마늘이 우리 집 수입의 전부인데 이래선 남는 게 없어요.”



29일 오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고운사에는 불에 타 무너진 연수전의 잔해와 고온에 깨진 범종이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고운사로 향하는 숲길. 입구에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산불 피해로 치료 중’이란 팻말을 건 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고운사 경내에는 ‘안전제일’이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 철제 펜스가 둘러쳐져 있었다. 주저 앉은 처마, 여기저기 흩어진 기왓조각, 종각에서 떨어진 종은 쪼개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29일 오후 불에 탄 고운사 연수전 잔해 앞에 빠른 복구를 기원하는 기와불사용 기와가 쌓여 있다.


보장 스님은 무너진 전각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보물로 지정된 건물도 다 탔어요. 국가유산청에서 다녀갔지만, 복원 일정도 예산도 아직 없습니다. 그저 절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게 위안이에요. 절은 무너졌지만, 마음을 지키는 건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29일 오후 안동시 일직면 권정생 어린이 문학관에 마련된 이재민 임시주택에서 지내는 한 할머니가 집안을 살펴보고 있다.


안동시 일직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모듈러 주택 단지 입구에는 ‘나눔합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방이 놓여 있었다.
박씨 할머니(90)는 아들과 함께 이곳에 살고 있다.
“불에 다 타버렸죠. 집 철거는 끝났는데, 새로 지을 돈이 없어요. 공사는 시작도 못 했고. 그래도 아들이 옆에서 잘 챙겨줘서 살고 있어요. 옛날 집이 그리워도, 여기가 지금 내 집이에요.”



29일 오후 안동시 남후면 남후농공단지의 한 식품공장에서 자비를 들여 새로운 공장의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 현장 너머로 잿더미로 변한 산이 보인다.


남후농공단지에서는 포크레인과 장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안휘철(69) 사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출이요? 담보물이 다 타버렸는데 뭘로 받겠어요. 도지사, 시장님이 보증해준다고 해도 막상 은행 가면 안 돼요. 사유지라서 규정상 어렵다나 뭐라나. 지금까지 받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29일 오후 안동시 남후면 남후농공단지의 한 피해 공장은 100여 일이 지난 이제서야 철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공장 운영 재개도 쉽지 않았다.
“현행 대출 제도론 엄두가 안 나요. 소상공인 3억 대출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는 사이 영업은 못 하고 시간만 흘러가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그는 복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로 ‘사면 문제’를 꼽았다.
“불에 탄 공장 뒤 사면이 위험한데 시는 ‘사유지라 못 해준다’는 말만 해요. 분양받을 땐 몰랐는데 쓰지 못하는 땅이 수백 평이에요. 이제 와서 알아서 하라니 답답하죠.”



29일 오후 청송군 청송읍 달기약수탕에서 한 주민이 약수를 받고 있다.


청송군 달기약수터 옆 공영주차장 한켠에는 불에 탄 트럭이 녹슨 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참혹했던 화재 당시 잔해만 남아있던 식당가는 모두 철거됐고, 일부 터에선 보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29일 오후 청송군 청송읍 달기약수탕 식당가의 모습. 불에 탄 나무 너머로 식당 여러 곳이 철거된 공터만 남아 있다.


잠시 멈췄던 약수터엔 다시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약수를 빈 통에 채우는 동안 사람들 사이엔 짧은 안부와 웃음이 오갔다. 주민 조창재(90)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찾은 약수터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여긴 내가 30년 넘게 다니던 곳이에요. 물맛이 좋아서 한 달에 몇 번씩은 왔지. 불나고 나선 발길을 끊었는데 다시 이렇게 오게 되니 가슴이 좀 풀리네요. 사람도 조금씩 돌아오고, 식당도 다시 짓고.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아요.”



29일 오후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 불에 탄 주택이 철거된 공터 멀리 잿더미로 변해버린 산이 보인다.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는 눈길이 닿는 산자락마다 아직도 검게 탄 흔적이 선명했다. 경로당에 모인 할머니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산불이었다.
김정자 할머니(70)는 식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불 난 뒤로는 맛을 몰라요. 탕약도 먹고, 병원도 다니는데도 도무지 회복이 안 돼요. 음식 타는 냄새라도 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손이 덜덜 떨려요. 트라우마 때문이에요.”
그는 트라우마 상담도 받아봤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몇 달에 한 번 전화 와서 ‘괜찮으세요?’ 하고 물어요. 근데 그사이에 우리가 어떻게 사는진 아무도 몰라요. 진짜 필요한 건 옆에 있어 주는 건데, 말뿐이니까요.”
할머니는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새 정부가 들어섰다지만 뭐, 크게 기대는 안 해요. 집을 새로 지을 계획이요? 없어요. 돈이 없으니까.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죠.”



29일 오후 영덕군 영덕읍 석리 따개비 마을 언덕 위에 수십 채의 이재민 임시주택이 설치되어 있다.


영덕군 지품면 산비탈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따라가자 까맣게 탄 나무들이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옆에선 벌목 작업이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산과 산 사이 도로 갓길에는 ‘산사태 주의’, ‘낙석 주의’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29일 오후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 하천 다리에 산사태 위험 지역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산불 피해 주민은 다시 산사태 발생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지난봄 산불 피해를 호소했던 문성규씨(67)의 표정은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나무는 일부 죽고, 일부는 살아서 다시 가꾸고 있어요. 사과꽃이 피긴 했는데, 열매가 잘 안 맺혀서 걱정했죠. 그래도 살아있는 나무들이 있어 다행이죠. 도장지도 받고 있어요. 2~3년 더 가꾸면 다시 사과가 열리겠죠. 뭐,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29일 오후 영덕군 영덕읍 석리 따개비 마을을 모습. 불에 탄 주택은 모두 철거되고, 낙석과 산사태 방지를 위한 방수포가 덮여 있다. 화마를 피한 주택에도 안전 문제로 주민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석리 따개비마을에는 예전엔 펜션이 있던 이 자리에 임시 모듈러 주택들이 들어섰다. 볼품없이 탄 주택들은 모두 철거됐고 집터엔 산사태와 낙석을 막기 위해 덮은 방수포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모듈러 주택 앞, 이불 꾸러미를 들고 걸어오는 전춘자 할머니(80)는 집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불이 난 날, 딸이 부산에서 전화 왔어요. 엄마 집에 불났대요. 그 소리 듣고 결국 울었어요, 딸도 울고 나도 울고. 다 태워 먹었는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이웃들과 함께 견디는 지금의 시간이 위로가 된다고도 했다.
“혼자가 아니니까 그나마 나아요. 서로 걱정해주고 음식도 나눠 먹고 같이 회복해가요. 햇반이라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 먹어봤어요. 누가 나눠줘서 먹었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고요.”



29일 오후 영덕군 영덕읍 대탄리의 모습. 불에 탄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낙석방지를 위한 그물이 설치되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주황색 지붕의 이재민 임시 주택이 보인다.


100일 전 ‘화마’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켰다. 산도, 집도, 사람들의 일상도 한 줌 재로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복구는 단지 건물을 다시 세우는 일이 아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견딜 수 있도록 삶을 붙드는 과정이다.
불은 꺼지고 그날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바람결에 실린 새순처럼, 말없이 피어난 능소화처럼, 삶은 그렇게 조금씩 다시 이어지고 있다.
/글 단정민, 사진 이용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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