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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호남수래 작성일25-06-22 14:41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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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영국 작가 키스 로(Kieth Lowe)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혼란상을 담아낸 책(Savage Cont 씨티은행 대출상담사 inent, 2012)에서 옮겨왔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고향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위로의 말을 듣기는커녕 조롱 또는 심지어 살해 위협을 받았다.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지 못한 데엔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이기도 했다. 귀환유대인들은 인간적 간이사업자 등록 배신감을 맛보았다. 귀중품을 맡겨놓았던 이웃 또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돌려주길 거부했다. 농지를 빌려 농사짓던 사람들도 수확물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예전에 살던 집을 순순히 돌려받은 경우는 드물었다. 큰 소리가 오가고 법정 다툼을 벌이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전시 당국으로부터 빈 아파트를 부여받은 기독교인들은 그 LTV 70%로 완화 집을 자기 소유로 여겼고, 그것을 증명해주는 서류를 갖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각각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적개심 어린 시선으로 유대인을 바라봤다. "전쟁 중에 사라진 모든 유대인 가운데 왜 나만 돌아온 유대인을 맞이해야 하느냐"고 한탄했다](키스 로, 328쪽).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도 집 때 119머니 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49년 뒤늦게 미국에서 돌아온 뒤 옛집을 되찾으려고 행정적․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건 내 집이야"라며 버티며 살던 사람을 마침내 쫓아낸 뒤, 아도르노는 "이렇게까지 내가 모질게 해야 했는가"라며 양가감정(ambivalence, 이중감정) 비슷한 회한을 느꼈다.


이율
▲ 1945년 4월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접수하면서 해방을 맞아 기뻐하는 여성 수감자들 Ⓒ영국군 제5군 Film & Photographic Unit



전쟁 뒤에도 이어진 반유대 피바람

귀향 유대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지역은 폴란드였다. "살아 돌아와서 반갑다. 고생 많이 했지?"라는 위로는커녕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힘들었어"라는 원망을 들었다.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폭행과 살해가 뒤따랐다. 역사학자들은 1946년 여름까지 폴란드에서 귀환 유대인 1500명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한다(키스 로, 337쪽).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 그들을 박해한 나라(독일)에 머무르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고 눌러 앉았다.
바르샤바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키엘체는 전쟁 전 인구 7만 명 가운데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전쟁 뒤 돌아온 유대인은 100여 명뿐이었다. 이들은 곧 넘쳐나는 반유대 정서에 부딪쳤다. 1946년 7월4일 포그롬(pogrom, 군중 폭동과 학살)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이 종교의식에 희생물로 바치려고 소년을 납치했다'는 허위 제보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밉상인데 사실 여부를 따질 것도 없었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유대인 42명을 죽였다. 이 유혈극엔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나서서 손에 피를 묻혔다. 폴란드의 반유대 정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유대인 출신의 미 작가 제이콥 미카노프스키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폴란드로 갔다. 포그롬이 벌어졌던 키엘체도 가봤다. 현지에서 만나본 사람들은 "귀환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폴란드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가 그러했다. 그의 최근작 동유럽 현지답사기(Goodbye Eastern Europe, 2023)를 보자.
[키엘체 유대인 학살은 고립되어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 또한 폴란드만이 귀환한 유대인을 폭력으로 맞이한 유일한 국가가 아니었다. 세슈프와 크라크푸(아우슈비츠 인근 대도시)에서도 유대인들이 집단수용소에서의 학대로 허약해진 몸을 살리려고 피를 훔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비슷한 사건들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도 벌어졌다](제이콥 미카노프스키, <굿바이, 동유럽>, 책과 함께, 2024, 339쪽).
동유럽 현지 주민들의 눈에 비친 유대인은 '죽은 이웃들이 살아있는 괴물의 형태로 돌아온' 것처럼 여겨졌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은 서방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종전 뒤 2년 동안 서방으로 빠져나온 폴란드 유대인은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동유럽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루마니아에서 1만 9000명, 헝가리에서 1만 8000명,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만 8000명이 탈출했다. 1950년까지 동유럽에서 모두 합쳐 적어도 30만 명이 고향을 등졌다(키스 로, 343쪽).
이들 최종 행선지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 통계청(CBS) 집계로는 이스라엘이 국가를 세운 1948년까지 약 9만 5000명이, 1948~1951년 사이에 13~15만 명이 유럽 땅에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https://www.cbs.gov.il에서 aliyah 검색). 유대인들을 이를 가리켜 알리야(aliyah, 귀환)라 부른다.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짐, 이산)의 반대 개념인 셈이다.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유대인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벌였던 학살은 인류전쟁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쟁범죄다. 전쟁 뒤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 집단학살)라는 새로운 용어가 국제법에 자리를 잡았고, 1948년 국제연합(UN)에서 제노사이드 협약(genocide convention,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까지 만들어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벌인 제노사이드'를 가리킨다. 희생자 규모는 1100만 명쯤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유대인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다른 집단에 속한 희생자들도 많다. 반나치 성향의 정치범과 레지스탕스, 소련군 포로,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의 비(非)유대계 민간인들, 집시(신티, 로마족), 장애인(신체, 정신)들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에 포함된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우린 600만 명 이상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태도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소문자 h를 대문자 H로 바꿔 아예 다른 집단의 희생자들이 없었던 듯이 여긴다. 따라서 Holocaust는 곧 유대인 희생을 가리킨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을 강조하다보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특히 1915년에서 1916년 사이)에 일어났던 튀르키에의 아르메니아 학살처럼 다른 지역, 다른 집단의 희생 사례를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함께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헨리 프리들랜더(1930-2012, 뉴욕시립대)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지냈던 고된 기억을 지닌 역사학자다. <나치 제노사이드의 기원: 안락사에서 최종해결까지>(The Origins of Nazi Genocide: From Euthanasia to the Final Solutio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7)이란 역작을 써냈다. 유대인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편협한 유대인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프리들랜더는 '열린 마음'을 지닌 연구자다. 그는 나치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희생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 △동유럽 비(非)유대계 민간인과 소련군 포로, △집시(로마, 신티)와 정신적․신체적 장애인이다. 그에 따르면, 나치 홀로코스트의 출발점은 1939년 장애인들을 제거하려는 액션 T4 프로그램이었으며, 유대인 학살에 이용된 독가스와 화장터가 모두 T4 프로그램에서 가져왔다. T4 프로그램의 전문가들은 1941년 나치 친위대가 동유럽 점령지에다 수용소 가스실을 설계하고 운영할 때 함께 거들었다(Henry Friedlander, 'Step by Step: The Expansion of Murder, 1939–1941', German Studies Review, Vol.17, No.3, 1994).
"히로시마, 드레스덴과 뒤섞지 말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유대인 지식인들 대부분은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을 내세우며 유대인 희생만을 강조한다. 프랑스 유대인인 시몬 베유(1927-2018, 본명은 시몬 자코브)은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부모와 오빠를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 풀려난 뒤 파리정치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1974년 보건부장관을 지냈다. 1979년부터 1993년까지 유럽의회 최초의 선출직 의장을 지내며 독일-프랑스의 화해와 유럽 통합에 나름의 힘을 기울였다.
베유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이력을 보면, '열린 마음을 지닌 유럽 지식인'의 한 사람이라 여길 것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2003년 9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대학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연구소' 개소식 연설문에서 베유는 홀로코스트는 '절대적 특수성에 둘러싸인 사건'이므로 다른 학살사건과 함께 말하지 말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이 '히로시마'라는 이름과 묶여서 함께 쓰이게 되는데, 이는 연합국과 나치 독일을 동등한 입장에 두려는 공작이다. 또한 유명 잡지 속에 1944년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들 사진과 1945년 해방 당시 베르겐-밸젠 수용소에서 나온 시체들이 쌓여 있던 수레들 사진이 같은 페이지에 실렸다. 이런 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이렇게 사건을 뒤섞는 일은 넘쳐난다. 가장 위험한 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망각․부정이 아니라 일반화 시도다.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은 결코 희석되거나 일반화돼선 안 된다](시몬 베유,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꿈꾼문고, 2019, 83-84쪽).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 유대인 작가 엘리 비젤(1928-2016)도 위의 시몬 베유와 같은 생각을 지녔다. 루마니아 출신인 비젤은 1944년 왼팔에 수감 번호 'A-7713'이 새겨진 아우슈비츠 생존자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수용소 시절을 그린 <밤>(La Nuit, 1960)이 그의 출세작이다. 그 뒤로도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여러 작품을 냈다.
1986년 '폭력과 억압, 인종 차별과의 투쟁에 기여한 공로'로 비젤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유일성)을 내세웠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언제 다시 홀로코스트를 당할지도 모를 고립무원의 피해자 집단의 보호자'라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유대인만의 생존을 강조했다. 강성 시오니스트인 그에겐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독'이다.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은 머릿속에 없었다. 그렇기에 "비젤이 노벨상 수상자가 맞느냐?"는 비판을 받곤 했다.
(노벨평화상이 잘못 주어졌다는 지적을 받는 유대인들은 여럿이다. 1978년 이스라엘 총리 베나헴 베긴은 이집트와 평화협상을 맺었다고 평화상을 받았다. 중동전쟁으로 빼앗은 시나이 반도를 돌려줬다고 상을 준다면, 강도가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줬다고 경찰서장으로부터 모범시민상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1973년 헨리 키신저가 베트남전쟁을 끝내기로 한 파리평화회담으로 받은 노벨평화상도 같은 논란을 불렀다. 북베트남 협상대표 레득토는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라며 평화상을 거절했다. 나치 박해를 피해 1938년 유대인 부모와 함께 독일을 떠났던 키신저는 2023년 죽기 전까지 어떤 모임을 가나 '노벨평화상 수상자 헨리 키신저 박사'로 사회자가 소개해주길 미리 알렸다).



▲ 유대인 희생자 얼굴을 형상화한 추모 철판 조형물.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방문객들은 바닥의 철판 위를 걸을 때 들리는 금속성 울림에서 희생자의 절규를 떠올린다. Ⓒ김재명



박노자, "홀로코스트는 단수가 아닌 복수다"

비록 유대인이 희생자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더라도, 나치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이 독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대인들이 Holocaust라는 단어로 다른 희생자들과 구별하려는 태도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문명비평가 조너선 글로버(킹스칼리지, 윤리학)은 나치 홀로코스트가 20세기의 다른 대량학살에 견주면 그렇게 독특하지도 않다고 여긴다. 그의 역작(Humanity: A Moral History of the 20th Century, 1999)에 실린 관련 대목을 보자.
[나치 대량학살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독특하지 않다. 처형당한 사람의 수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뚱은 히틀러를 능가한다. 처형당한 사람의 인구비례로 따지면 폴 포트(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지도자)가 히틀러를 능가한다](조너선 글로버, <휴머니티>. 문예출판사, 2008, 616쪽).
조너선도 나치의 대량학살에는 다른 학살들에 견주어 '유별나게 도덕적인 끔찍함'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대하는 '악의'의 강도가 달랐다는 점에서다. '적극적 악의'(active malice) 또는 '강화된 증오'(intensified hatred)로 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너선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태도를 못 마땅해 한다. 유대인 희생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치 학살의 역사적․도덕적 성격을 유대인에게만 한정하질 않고 보다 넓은 인류의 비극과 윤리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다.
박노자(오슬로국립대, 역사학)는 조너선보다 더 또렷한 목소리로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독점을 반대한다. 유대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노자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태도에 매우 비판적이다.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유대인 단체들을 비판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전 드폴대, 정치학)의 역작 <홀로코스트 산업>(Holocaust Industry, 2003) 앞머리에 실린 박노자의 추천사를 보자.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혹정, 불평등 무역, 책임 유기로 2000만 인도 주민을 굶겨 죽인 것이나, 16-17세기의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미주 인구의 90%를 무기․병균․노예화로 죽인 만행에 견주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대인 말살은 제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들 중 하나로 보일 따름이다. 유대인 말살이라는 범죄에 '독특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식민지에서 개발된 인종말살(genocide) 기술을 유럽에 이식시킨 것뿐이다. 유럽 역사를 세계사의 핵심으로 보는 서구중심주의자들에게는 유대인 말살이 유럽 안에서 '유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홀로코스트는 단수가 아닌 복수(複數)다](노르만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 2004, 13-14쪽).
윤리적 자본이자 트럼프의 으뜸패
"우린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이에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분쟁을 취재하러 가서 그곳 정치인이나 대학교수 등을 만날 때마다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유대인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를 겪은 만큼 어떤 외부의 정치군사적 위협에도 단호히 맞설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전쟁범죄 혐의를 드러내놓고 뭉갠다.
나치 수용소에 고생했던 '진짜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1953-)은 그런 유대인들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매우 못 마땅하게 여긴다. 그는 유대인들이 집시와 같은 사회적 약자나 다른 약소민족을 홀로코스트 희생자들로 함께 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점적 특권'의 손실, 그에 따른 '윤리적 자본'(moral capital)의 손실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 풀이했다(노르만 핀켈슈타인, 118쪽). 같은 유대인이자 '21세기의 지성인'으로 평가 받은 노엄 촘스키(1928-, MIT대, 언어학)는 핀켈슈타인을 적극 지지한다(촘스키에 대해선 다음 주 글에서 다시 살펴본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겐 트럼프 카드놀이의 으뜸패나 마찬가지로 힘을 쓴다. 전쟁범죄의 면죄부로 홀로코스트만큼 편리한 카드가 없다. 유대인들은 나치 학살의 최대 피해자임을 내세우며 면죄부인양 홀로코스트 카드를 내민다. 중동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벌이는 전쟁범죄를 흐리려는 모습은 '홀로코스트가 안겨준 윤리적 자본의 오용'이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1945년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10만"
'홀로코스트 희생자' 범위를 유대인에게 한정할 것인가의 특수성 논란과 더불어 유대인 생존자 규모도 큰 논란거리다. 1945년 5월8일 독일의 공식 항복 무렵,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가리켜 '홀로코스트 생존자'(holocaust survivor)라 부른다. 유대인 게토(ghetto)에 갇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1933년 히틀러 집권 뒤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인종법'(1935)을 비롯해 갈수록 거세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합법적으로) 옮겨갔거나 도망쳤던 사람들을 '홀로코스트 생존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해에 경찰 조사를 받다가 풀려난 뒤 곧바로 프랑스로 도망쳤다. 1940년 5월 독일의 프랑스 침공 뒤 들어선 비시 괴뢰정부는 아렌트를 비롯한 독일계 외국인을 '잠재적 적국민'으로 여겨 수용소에 가두었다. 아렌트는 한두 달 뒤 수용소를 탈출해 1941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아렌트는 자신을 '홀로코스트 생존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압수한 문서(친위대 소속으로 수용소 관리부서인 중앙경제행정국이 만든 문서)에 따르면, 1942년 8월 수감자는 22만 4000명이었는데, 1944년 8월엔 52만 4286명(남자 37만 9167명, 여자 14만 5119명으로 늘어났다. 전쟁 끝 무렵인 1945년 1월15일엔 약 4만 명의 경비대원들 감시 아래 71만 4211명(남자는 51만 1537명, 여자는 20만 2674명)의 수감자들이 갇혀 있었다(Yehuda Bauer, 'The Death-Marches, January-May, 1945', Modern Judaism, 1983, Vol.3, No.1).
위 통계를 옮긴 체코 출신의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1926-2024, 예루살렘 히브리대)는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강요한 '죽음의 행진'과 학살, 기아, 질병 등으로 생존 수감자 숫자가 매우 빠르게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를테면, 1945년 4월15일 영국군이 해방시킨 베르겐-벨젠 수용소엔 6만 명의 수감자가 있었는데, 4월15일부터 6월까지 1만 4000명이 죽었다. 워낙 병약했던 탓이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레너드 디너스타인(1934-2019, 애리조나대)은 이렇게 기록했다. "6만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걸어 나왔다. 1주일 뒤 그들 가운데 2만 명이 사망했다"(미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여러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의 글을 모아 1995년에 펴낸 , 28쪽).
지난 글(연재 121)에서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선 5만 8000명이 경비대원을 따라 '죽음의 행진'을 떠나고 병약자 7000명이 남았다고 했다. 독일 본토에 있던 다른 수용소의 생존 비율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높다. 1945년 4월11일 미국이 해방시킨 부헨발트 수용소는 2만 1000명, 1945년 4월15일 영국군에게 해방된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6만 명, 1945년 4월29일(히틀러 자살 하루 전) 미군이 해방시킨 다하우 수용소는 3만 2000명에 이른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합한 숫자다.
글 위에서 '열린 마음을 지닌 유대인 역사학자'라 했던 헨리 프리들랜더(뉴욕시립대)는 1945년 1월 수감자가 71만 명이라는 친위대 중앙경제행정국(SS-WVHA) 문서를 바탕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 5월 유대인 생존자 숫자를 10만 명으로 추산했다. 핀켈슈타인의 책에서 프리들랜더가 어떤 근거로 '유대인 10만 생존자'를 말하는지 보자.
[1945년 초에 수용소 수감자들이 71만 5000명이었다면, 1945년 봄에는 최소한 3분의 1(약 23만 8000명)이 사망했다 치더라도 생존수감자는 기껏해야 45만 7000명을 넘지 않았다. 유대인은 체계적으로 집중 살해됐고, 오직 노동을 위해 선별된 자들(아우슈비츠의 경우 수감자의 15%)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대인들은 분명히 수용소 인원의 20%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 생존자는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 추산할 수 있다](노르만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 2004, 170쪽에서 재인용).
프리들랜더는 '유대인 생존자'를 10만 명으로 추산했지만, 예루살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인 야드 바셈(Yad Vashem)은 25만 또는 30만 명쯤으로 잡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1945년 풀려난 바로 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생존자는 훨씬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핀켈슈타인은 그의 역작인 <홀로코스트 산업>에서 프리들랜더의 10만 생존자 설을 바탕으로, 50년이 흐른 지금 '현재 살아있는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4분의 1을 넘지 않을 것'이라 추정했다(노르만 핀켈슈타인, 123쪽).



▲ 홀로코스트 희생집단에는 집시(신티, 로마족)도 있다. 적어도 20만 명에서 많게는 50만 명이 학살됐다. 집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베를린 야외 상설전시관.Ⓒ김재명



"다들 생존자라 우기면, 히틀러는 누굴 죽였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줄어드는 자연수명을 떠올리면,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갈수록 줄어들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1950년대 이후부터 독일로부터 배상이 이뤄지면서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숫자는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지난 전쟁 중에 게토나 수용소 말고 다른 지역에 머물렀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나도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많아졌다. 유대인들은 '생존자'의 개념도 넓히려들었다. 한 홀로코스트 관련 웹사이트에는 "나의 할머니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기에 나도 홀로코스트 희생자"라며 배상 청구를 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마저 실렸다.
그런 목소리들을 받아들여서일까, 지난 2000년 이스라엘 정부 총리부는 '살아있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규모를 거의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나치수용소와 게토에 갇혀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뿐 아니라, 독일을 떠났거나 어딘가에 숨어 있던 사람들마저 '홀로코스트 생존자' 속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스스로를 '생존자'라 주장하는 상당수의 '가짜 생존자'들이 포함됐을 것으로 짐작된다(이스라엘 통계청은 2025년 현재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12만 명쯤으로 추산한다).
불어난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숫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 가운데는 '진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있다.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어머니는 전쟁 중에 바르샤바 게토와 루블린의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6년을 보내다 살아남았다. 핀켈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나의 어머니는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곤 했다. "사람들이 죄다 생존자라고 박박 우기면 대체 히틀러는 누굴 죽였던 말이냐?"(노르만 핀켈슈타인, 123쪽).
심각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미 유대인 단체들은 △유대인 강제노동으로 이득을 챙겼던 독일 기업들, △죽은 유대인들의 휴면계좌를 숨겨온 스위스은행을 상대로 거액을 받아냈다. 그러나 실제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배상금을 건네질 않았다. 6년 동안 나치의 억압에 시달리며 죽을 고생을 했던 핀켈슈타인의 어머니는 겨우 3500달러의 배상금을 받았을 뿐이다.
"가난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시급히 도와야 한다"며 협상 타결을 재촉했던 변호사와 유대인단체 임원들은? 저마다 몇 십만 달러의 목돈을 챙겼고, 남은 돈은 홀로코스트 교육 명목의 단체 기금을 두둑이 쌓아놓았다. 배상금을 내는 쪽(독일과 스위스)과 받아야 할 쪽(생존자)을 모두를 뜯어낸 이른바 '이중 갈취'(double extortion)의 결과다.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잇속을 챙기는 홀로코스트 산업가들의 맨얼굴을 다음 주에 들여다보자.(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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