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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이어령이 입씨름을 하면 누가 이길까?
한번 입 열면 네댓 시간 자기 말만 하기로 ‘악명’ 높은 이어령이지만, 백남준 한 마디에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허~ 이어령이 말 잘하네.” 천하의 이어령에게 “말을 적게 하면 써먹을 데 많은 재사(才士)”라 훈수 둔 이도 백남준. 물론 이어령도 지지 않았다. “백형, 영어 잘하지? ‘오 연말정산원리금상환 월이 오면 순이네 장독대에 장맛도 익어가것다’를 영어로 번역해 보시게.” 두 천재의 만남을 주선했던 이용우는 “막상막하의 경지를 보았다”며 웃었다.
세계 미술계에서 ‘비엔날레맨’으로 통하는 이용우는 30년 전 백남준과 더불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건립한 데 이어, 광주 비엔날레 창설을 주도하며 한국 현대미술사의 두 ‘결정적 순간’을 장기투자 일궈낸 주역. 지난달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개막식에 참석한 그는 “한국관 창설자 세 사람 중 백남준, 김석철 선생은 떠나고 한 분만 남았다며 나를 소개할 때 가슴이 아려왔다”고 했다.
◇백남준의 사기?
-130년 역사의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만들게 된 것이 ‘백남준의 사기’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 1억원 대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보고 비엔날레에 한국관 건립을 제안하셨다. ‘한국관을 만들어주면 남북한 예술을 동시에 선보이겠다. 예술을 넘어 역사적 공간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남북한 통일의 물꼬가 트이면 베네치아 시장은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라고(웃음).”
-결과적으로 ‘사기’를 친 셈이다.
“예술 국민은행 대출이자계산기 가의 꿈과 상상력은 죄가 아니다. 통일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베를린 장벽은 결국 휴머니즘, 인본주의가 무너뜨렸다.”
-한국관이 왜 중요했나?
“미술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아시아 변방인 대한민국의 예술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관 건립에 백남준을 앞세운 이가 이용우라던데.
별내선 연장 “선생님이 ‘대장’이 돼주셔야 한다고 했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작가가 됐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백남준이야말로 우리의 간판이자 무기였다. 베네치아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건축가 김석철의 실무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한국관을 만들려면 베네치아시(市)가 승인해 줘야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한국관 공동 설계자인 프랑코 만쿠조와 함께 시청 공무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백 선생은 고비 고비에 뉴욕에서 베네치아로 날아와 해결사 역할을 했다. ‘이게 될까요?’ 걱정하면 ‘일단 해봐!’ 외치면서!”
-한국 단색화를 세계에 알린 것도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였다. 당시 이용우가 큐레이터였다.
“윤형근, 정창섭,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등 한국 단색화가들을 세계 미술 시장에서 크게 주목하자 비엔날레를 통해 그 예술적 가치를 알려보자는 제안이 왔다.”
-단색화 전시를 맡는다고 민중미술 쪽에서 비판을 받았다던데.
“민중미술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작품들, 이른바 걸개그림류의 과격하고도 직설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1980년대를 주도했다. 그들 눈에 단색화는 비겁한 선배 세대 화가들이 서양 모노크롬 회화를 흉내 낸 자조적 예술이었다.”
-그런데 왜 참여했나?
“단색화의 키워드는 ‘무목적성’ ‘반복성’이다. 표현의 자유가 탄압받던 박정희 시대에 절망한 예술가들의 몸짓, 어둡고 칙칙하게 반복되는 붓질이 단색화를 탄생시켰고, 나는 그것이 우리 미술사의 주요한 예술운동이자, 한국의 독창적인 모노크롬 회화라고 보았다.”
-단색화 전시에 훗날 김환기의 최고가(最高價) 작품이 된 ‘우주’도 걸렸다.
“김환기는 한국 단색화의 뿌리다. 점묘화 속 수많은 점들이 70년대 맨해튼 고층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이다. 가난했던 수화는 그림으로 병원 진료비를 냈는데, ‘우주’도 그중 한 작품이었다.”



김환기의 '우주'. 한국 미술품 중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태경 기자


◇광주 비엔날레, 깨지지 않는 기록
-광주 비엔날레의 산파 역할도 했다. 첫 회 관객 수가 163만명을 돌파했다.
“광주 비엔날레를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원로 조각가 김영중 선생, 이걸 호기롭게 밀어붙인 강운태 광주 시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왜 광주였나?
“‘처형의 땅’ ‘슬픔의 땅’으로 인식된 광주를 예술로 치유해 보자는 것이 광주 출신 김영중의 바람이었다. 일반 여염집에도 산수화 하나씩은 걸려 있다고 할 만큼 예향(藝鄕)이었던 광주를 소외된 도시, 저개발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진보 시민단체들은 반기지 않았다던데.
“5·18 특별법을 제정해 희생자를 위한 보상 논의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비엔날레로 특별법 제정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했다. 그러나 김영중 선생은 광주의 상처가 제도적·물질적 보상보다는 예술로 치유되길 바라셨다.”
-60일 동안 163만 명의 관객이 온 건, 베네치아를 포함해 비엔날레 역사상 깨지지 않는 기록이라고 하더라.
“광주에 빚진 마음을 가진 국민들이 많이 찾아와 주셨다. 엑스포처럼 재미난 볼거리, 놀거리가 있는 줄 알고 시골 노인들까지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온 경우도 많았다(웃음). 하루에만 3만5000명이 입장한 날도 있다.”
-막상 와 보면 정치·사회적 이슈를 담은 난해한 현대미술에 당황했을 것 같은데.
“그래서 피카소전을 특별전으로 마련했다. 대한민국에서 열린 최초의 피카소전으로, 항온·항습 장치도 없던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해 크게 흥행했다.”
-첫해에 75억원의 흑자를 냈더라.
“광주를 예술로 치유하겠다는 이들의 불면과 땀과 눈물이 일궈낸 결실이다. 광주 비엔날레의 30년에 종잣돈이 됐다.”



2015년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했다 철거된 홍성담의 '세월오월'.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표현해 논란이 됐다.


◇‘광주 정신’ 함의 더 넓어져야
-박근혜 대통령을 비하한 ‘홍성담 사건’ 등 광주 비엔날레 파행의 현장에도 있었다.
“광주 비엔날레 20주년이었고, 내가 대표이사였다. 작가 선정은 큐레이터들 권한이라 관여하지 않았는데, 개막 직전 사고가 터졌다.”
-윤장현 당시 광주 시장은 ‘전시 불가’를 결정했고, 이에 항의해 대표직을 사퇴했다.
“내가 그 작품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시장은 중앙 정부의 예산을 지원받는 처지이니 못 걸게 할 수 있지만, 나는 비엔날레 대표로서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고 믿었다. 권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전 검열해 작품을 철거한다는 것은 비엔날레의 철학에도 맞지 않았다.”
-얼마 전엔 ‘박서보 예술상 폐지’로 광주 비엔날레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광주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광주 비엔날레 선언문을 쓴 당사자로서 ‘광주 정신’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광주 정신의 함의는 넓고 깊은 포용성이다. 광주 정신이 거부의 잣대로 비쳐선 안 된다.”
-광주 비엔날레를 찾는 관객 수도 예전 같지 않다.
“요즘은 30만~50만명이 찾는다던데 그 또한 어마어마한 숫자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80만~90만명이 들지만 전시 기간만 6개월이 넘는다. 논란의 30년이었지만 광주 비엔날레가 세계 5대 비엔날레로 꼽히며 변방에 머물던 아시아 미술을 부흥시킨 것은 엄청난 성과다.”
-홍성담 파동으로 광주 비엔날레를 떠난 뒤 중국 상하이로 가셨더라. 히말라야 미술관장을 거쳐 현재 통지대 교수로 있다.
“국내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상하이 프로젝트’ 등 전시 기획, 저술 활동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시각예술의 관점에서 급변하는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장을 넓혀가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백남준.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황성옛터'였다. /조선일보DB


◇예술이 금융이 된 현실
-이용우란 이름은 국립현대미술관장 후보 명단에 늘 오르내린다. 문재인 정부 때는 1위로 자격 심사를 통과하고도 관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 일이고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국립미술관장을 응모를 통해 뽑는 시스템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외 공공 미술관은 엄격한 검증 시스템을 거쳐 이사회가 선정한다. 한국은 공평성 때문에 응모 시스템을 고집하는 것 같은데, 그 공평성을 지키지 못해 논란이 이는 걸 보면 아이러니다(웃음).”
-이용우는 진보 성향의 비평가인가?
“나는 논리와 실증을 중시하는 증거주의자다. 학생들에게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데올로기에 편승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첫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어쩌다 미술계로 갔나?
“어릴 때 꿈이 화가였는데 불행히도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웃음). 신문사에서 미술 기자로 일할 때 비평과 전시 기획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부터 베네치아 비엔날레까지 함께한 백남준 선생은 나만 보면 ‘(신문사) 때려쳤냐?’고 물으셨다(웃음).”
-백남준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뉴욕에 갔을 때 백 선생이 전화해 작업실로 오라고 하더라. 피아노를 치고 계셨는데 ‘황성옛터’였다. 그걸 다 치고 돌아서는데 눈물을 흘리고 계시더라. 얼마 후 마이애미에서 돌아가셨다.”
-이우환 작가와도 각별하던데.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지구’라고 답하시는 분. ‘한국적 예술’이란 말을 듣는 순간 예술가는 끝난다고 믿는 작가다(웃음).”
-한국의 미술 시장도 커졌다. 컬렉터 연령이 2030 세대까지 확 내려왔다.
“좋은 현상이지만 미술이 시장 중심으로 가면서 비평 기능이 약화되고 예술이 금융이 된 현실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예술에 한 가지 답은 없다고 했다.
“차별, 폭력, 페미니즘, 동성애 이슈를 앞세워 난장판이 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당시 뉴욕타임스에서 역사상 최악의 비엔날레였다고 혹평받았지만, 지금은 혁신과 도전이 팔팔하게 살아 있던 비엔날레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때려쳐야 혁명이 온다’는 백남준의 신념은 예술은 물론 우리 인생에도 해당된다.”
☞이용우
1952년 충남 당진 출생.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홍익대에서 미술사 석사,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고려대 미술교육과 교수, 광주 비엔날레 예술총감독·대표이사, 세계비엔날레협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인 최초로 베네치아 비엔날레 심사위원을 맡았다. 상하이 히말라야 미술관장을 거쳐 통지대 건축대학 교수로 있다.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등 5권의 저술이 있다.